파독 위너 토토 양성소로 '인산인해'…"폐광, 우리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
김진태 도지사·김시성 도의장 "재독 위너 토토·간호사 헌신 잊지 않아"

독일서 만난 파독 위너 토토 기억하는 삼척 도계광업소는

파독 위너 토토 양성소로 '인산인해'…"폐광, 우리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

김진태 도지사·김시성 도의장 "재독 위너 토토·간호사 헌신 잊지 않아"

위너 토토
파독 위너 토토 김태석·파독 간호사 김순복·파독 위너 토토 손재남씨
[촬영 이재현]

(에센·뒤셀도르프=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글뤽 아우프(Glueck Auf)"

독일의 대표적 탄광지인 에센과 보훔을 방문 중인 강원특별자치도 유럽 방문단이 28일(현지시간) 뒤셀도르프 한 식당에서 개최한 재독강원도민회 간담회 자리.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을 지탱한 산업역군인 파독 위너 토토들은 연달아 '글뤽 아우프'라는 인사를 건네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글뤽 아우프'는 '(깊은 갱도에서) 무사히 올라오라'는 의미로, 탄광 갱도에 들어갈 때 교대하는 위너 토토들이 나누는 독일어 인사말이다.

1천m 아래 지하 막장에서 매일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는 서로에게 빌어주는 행운의 주문인 셈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재독 도민 중 파독 위너 토토 출신의 어르신들 일부는 이 같은 의미가 담긴 인사말을 나누며 때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위너 토토
파독 위너 토토들이 훈련 후 찍은 사진
[촬영 이재현]

첫 한국인 위너 토토 파독일은 한국 위너 토토 파견에 관한 한독협정서 체결 이후인 1963년 12월 22일이다.

이날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123명, 닷새 후 124명 등 1진 모두 247명이 도착하면서 위너 토토 파독이 시작됐다.

이후 1977년까지 75차례에 걸쳐 모두 7천936명이 위너 토토로 독일에 파견됐다.

이들 파독 위너 토토들은 모두 삼척 도계광업소와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독일 광산 작업에 필요한 실습을 해야 했다.

장성광업소는 1년 전인 지난해 6월 폐광했다. 오는 30일 도계광업소마저 문을 닫고 나면 대한석탄공사 산하 공영 탄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이들 파독 위너 토토들에게는 삼척 도계광업소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파독 위너 토토 광산박물관
[촬영 이재현]

심동간(72)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장은 "파독 위너 토토 60주년이 2년 전 이었다. 이제는 상당수 파독 위너 토토의 나이가 80대로 접어들었다. 2018년 독일 탄광이 모두 문을 닫은 것처럼 삼척 도계광업소가 문을 닫으면 우리가 기억하는 탄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삼척 도계광업소에서 1970년 4월 위너 토토 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파독 위너 토토로 독일로 온 김태석(81·보훔)씨는 "당시 도계광업소는 파독 위너 토토들의 인력 양성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원래 교육이 6주였지만 파독 인력 부족으로 3∼4일 만에 교육 수료 후 바로 파독한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며 고백하듯 토로한 김 어르신의 이야기 행간에서 산업화 시대 독일이 부족한 인력을 우리나라에서 파견한 파독 위너 토토들로 지탱해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동해 출신의 손재남(83) 어르신은 "위너 토토는 8배, 간호사는 5배의 임금을 받을 기회였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가 도계광업소로 모여들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파독위너 토토기념회관 둘러보는 도 방문단
[촬영 이재현]

당시 우리 정부는 1961년 서독에서 1억5천만 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기준 약 300억원)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합의하고, 이후 번성하던 독일 경제에 부족한 인력을 지원하기 위해 1963년 한독협정서를 시작으로 위너 토토와 간호사를 파견했다.

간호사 파견은 3년 뒤인 1966년부터다.

파독 위너 토토뿐만 아니라 파독 간호사들도 삼척 도계광업소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삼척 도계가 고향인 김순복(86·여) 재독강원도민회장은 "독일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어 건강검진을 해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 역시 위너 토토 간호사로 왔다가 독일인과 결혼해 정착한 뒤 55년째 살고 있다.

1964∼1975년 위너 토토와 간호사들의 국내 송금총액은 1억7천만 달러로, 초기에는 당시 총수출액 대비 2%에 육박하는 큰 금액이었다.

파독 위너 토토들의 당시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기준 13만∼19만원)로, 국내 직장인 평균의 8배에 달했다.

파독위너 토토기념회관 둘러보는 도 방문단
[촬영 이재현]

앞서 전날 에센 파독위너 토토기념회관 겸 한인문화회관을 찾은 김진태 도지사는 방명록에 '재독 위너 토토·간호사 여러분들 삶의 흔적을 대한민국의 역사, 유네스코(UNESCO)의 역사로 만들겠다'는 글을 남겼다.

김시성 도의장은 '파독 위너 토토·간호사의 헌신을 대한민국 국민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기록했고, 태백이 지역구인 문관현 기획행정위원장은 '대한민국의 숨은 영웅, 산업전사 파독 위너 토토의 헌신과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적었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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