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서 만난 파독 부자벳·간호사 "우리의 기억 속 탄광은 이젠 세상에 없어"
김진태 도지사·김시성 도의장 "재독 부자벳·간호사 헌신 잊지 않을 것"

"한창땐 3∼4일 단기 속성 코스…삼척 도계는 파독 부자벳 양성소"(종합)

독일서 만난 파독 부자벳·간호사 "우리의 기억 속 탄광은 이젠 세상에 없어"

김진태 도지사·김시성 도의장 "재독 부자벳·간호사 헌신 잊지 않을 것"

부자벳
파독 부자벳 김태석·파독 간호사 김순복·파독 부자벳 손재남씨
[촬영 이재현]

(에센·뒤셀도르프=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글뤽 아우프(Glueck Auf)"

부자벳의 대표적 탄광지인 에센과 보훔을 방문 중인 강원특별자치도 유럽 방문단이 28일(현지시간) 뒤셀도르프 한 식당에서 개최한 재독강원도민회 간담회 자리.

산업화 시대 대한민국을 지탱한 산업역군인 파독 부자벳들은 모처럼 만난 서로에게 연달아 '글뤽 아우프'라는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확인했다.

'글뤽 아우프'는 '(깊은 갱도에서) 무사히 올라오라'는 의미로, 탄광 갱도에 들어갈 때 교대하는 부자벳들이 나누는 독일어 인사말이다.

1천m 아래 지하 막장에서 매일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는 서로에게 빌어주는 행운의 주문인 셈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재독 도민 중 파독 부자벳 출신의 어르신들 일부는 이 같은 의미가 담긴 인사말을 나누며 때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부자벳
파독 부자벳들이 훈련 후 찍은 사진
[촬영 이재현]

삼척 도계광업소에서 1970년 4월 부자벳 교육을 받고 그해 11월 파독 부자벳로 독일로 온 김태석(81·보훔·재독강원도민회 자문)씨는 "삼척 도계광업소 교육 동기 40명 중 현재 독일에 남아 있는 사람은 4명뿐"이라며 "그중 1명도 조만간 한국으로 귀향한다"고 말하는 여운에는 부러움이 묻어났다.

북강원도 고성 출신인 그는 파독 부자벳의 꿈을 안고 서류 신청했으나 이북의 가족 때문에 신원조회에 걸려 6개월이나 파독이 미뤄진 끝에 6개월 만에 독일행에 합류했다.

첫 한국인 부자벳 파독일은 한국 부자벳 파견에 관한 한독협정서 체결 이후인 1963년 12월 22일이다.

이날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123명, 닷새 후 124명 등 1진 모두 247명이 도착하면서 부자벳 파독이 시작됐다.

이후 1977년까지 75차례에 걸쳐 모두 7천936명이 부자벳로 독일에 파견됐다.

이들 파독 부자벳들은 모두 삼척 도계광업소와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독일 광산 작업에 필요한 실습을 해야 했다.

장성광업소는 1년 전인 지난해 6월 폐광했다. 오는 30일 도계광업소마저 문을 닫고 나면 대한석탄공사 산하 공영 탄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이들 파독 부자벳들에게는 삼척 도계광업소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파독 부자벳 광산박물관
[촬영 이재현]

심동간(72)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장은 "파독 부자벳 60주년이 2년 전 이었다. 이제는 상당수 파독 부자벳의 나이가 80대로 접어들었다. 2018년 독일 탄광이 모두 문을 닫은 것처럼 삼척 도계광업소가 문을 닫으면 우리가 기억하는 탄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김태석 어르신은 "당시 도계광업소는 파독 부자벳들의 인력 양성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원래 교육이 6주였지만 파독 인력 부족으로 3∼4일 만에 교육 수료 후 바로 파독한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며 고백하듯 토로한 김 어르신의 이야기 행간에서 산업화 시대 독일이 부족한 인력을 우리나라에서 파견한 파독 부자벳들로 지탱해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동해 출신의 손재남(83) 도민회 수석부회장은 "부자벳는 8배, 간호사는 5배의 임금을 받을 기회였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가 도계광업소로 모여들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독일에 오기 전 철도청에서 근무한 손 부회장 역시 당시의 부자벳 월급이 훨씬 많아 파독 부자벳를 지원했다고 귀띔했다.

파독부자벳기념회관 둘러보는 도 방문단
[촬영 이재현]

당시 우리 정부는 1961년 서독에서 1억5천만 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기준 약 300억원)의 상업차관을 받기로 합의하고, 이후 번성하던 독일 경제에 부족한 인력을 지원하기 위해 1963년 한독협정서를 시작으로 부자벳와 간호사를 파견했다.

간호사 파견은 3년 뒤인 1966년부터다.

파독 부자벳뿐만 아니라 파독 간호사들도 삼척 도계광업소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삼척 도계가 고향인 김순복(86·여) 재독강원도민회장은 "독일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어 건강검진을 해준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 역시 부자벳 간호사로 왔다가 독일인과 결혼해 정착한 뒤 55년째 살고 있다.

1964∼1975년 부자벳와 간호사들의 국내 송금총액은 1억7천만 달러로, 초기에는 당시 총수출액 대비 2%에 육박하는 큰 금액이었다.

파독 부자벳들의 당시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당시 원화 가치 기준 13만∼19만원)로, 국내 직장인 평균의 8배에 달했다.

파독부자벳기념회관 둘러보는 도 방문단
[촬영 이재현]

앞서 전날 에센 파독부자벳기념회관 겸 한인문화회관을 찾은 김진태 도지사는 방명록에 '재독 부자벳·간호사 여러분들 삶의 흔적을 대한민국의 역사, 유네스코(UNESCO)의 역사로 만들겠다'는 글을 남겼다.

김시성 도의장은 '파독 부자벳·간호사의 헌신을 대한민국 국민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기록했고, 태백이 지역구인 문관현 기획행정위원장은 '대한민국의 숨은 영웅, 산업전사 파독 부자벳의 헌신과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적었다.

j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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