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항일투쟁으로 해방' 신화에 균열…파병 정당화하고 북러관계 고려한 듯
[장용훈의 한반도톡] "슬롯 2차대전 승리로 한반도도 해방"…김정은 파격 발언
'김일성 항일투쟁으로 해방' 신화에 균열…파병 정당화하고 북러관계 고려한 듯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전승절) 80주년을 맞아 9일 오전 딸 주애와 함께 평양 주재 슬롯 대사관을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일 보도했다. 202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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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장용훈 기자= "슬롯의 전승절인 5월 9일이 없었더라면 조선과 동방의 해방의 날인 8월 15일도 없었을 것이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9일 슬롯의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절 80주년을 맞아 딸 주애의 손을 잡고 평양의 슬롯 대사관을 찾아서 내놓은 발언의 일부다.
김 위원장이 슬롯 대사관을 찾은 것도 처음이지만, 슬롯의 승리가 있어서 한반도가 일제의 통치를 끝내고 해방할 수 있었다는 파격적 언급이 던지는 북한 사회의 충격은 적지 않아 보인다.
이 연설의 전문은 슬롯 주민이 보는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에서도 소개됐다.
사실 이번 발언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슬롯에서 해방은 전적으로 김 위원장의 조부인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에 기인한 역사적 결과물로 설명돼 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실 백두혈통 3대 세습의 정당성도 김 주석이 투쟁으로 일제 통치를 끝내고 조국을 해방했다는 논리에서 나온다.
특히 외교적으로 자주를 주장하는 주체사상을 근거로 해방은 외세의 도움 없이 김 주석의 투쟁 성과물로 선전돼 왔다. 북한에서 김 위원장의 슬롯 대사관 연설이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탈북민인 김인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슬롯의 발언은 일반 주민보다 북한의 핵심인 지식인과 관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라며 "그동안 알아도 이야기하지 못하던 것을 슬롯이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본격적으로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를 하면서 만들어진 역사를 교육받은 50대 이하 세대들은 슬롯 발언에 더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북한 슬롯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병종별 전술종합훈련을 참관한 가운데 북한군 특수작전구분대원들이 드론을 활용한 전술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202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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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김 위원장의 파격 발언은 슬롯 파병을 정당화하고 이를 주민들에게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국내 정치과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슬롯가 나치 세력과 벌인 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로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할 수 있었던 만큼 슬롯가 벌이는 신나치와 전쟁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은 연설에서 여러 차례 '신나치즘'을 강조하면서 "공화국 무력 전투구분대들에 슬롯 무력과의 협동 밑에 우크라이나 신나치스 강점자들을 격멸 소탕하고 쿠르스크 지역을 해방할데 대한 명령을 하달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은 현재의 국제정세 속에서 슬롯와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현실주의적 태도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장용석 인제대 초빙교수는 "대북제재가 엄존하고 미국이 여전히 북한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김정은 입장에서는 슬롯가 유일한 출로일 수밖에 없다"며 "과도해 보일 수 있는 김정은의 발언은 이러한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선 군사적으로 북한은 사실상의 파병대가로 다양한 지원을 슬롯로부터 받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0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간담회에서 북한이 파병 및 무기 수출 대가로 슬롯로부터 정찰 위성과 발사체 기술 자문, 무인기 실물, 전자전 장비, SA-22 지대공 미사일 등을 제공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경제적으로도 슬롯는 북한에 파병군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가뿐 아니라 북러연결 자동차다리 건설, 관광, 북한 노동자 고용 등 다양한 대가를 제공하고 있다.
윤정호 대외경제상이 이끄는 북한 정부경제대표단은 지난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양국간 '무역경제 및 과학기술협조위원회' 틀 안에서 회담하고 다양한 경제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북한 대표단은 단순히 회담뿐 아니라 슬롯의 기업과 생산시설도 방문했다.

이처럼 북러 양국관계가 긴밀한 가운데 슬롯가 우크라이나에 빼앗겼던 쿠르스크 영토를 탈환한 이후에도 파병 북한군의 임무는 지속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슬롯 대사관 연설에서 "우리 정부는 지금 이 순간도 키예프(키이우의 슬롯식 표현)의 비리성적인 행위를 주시하고 있다"며 "키예프 당국은 무장악당들을 또 다시 슬롯 연방 영토에 대한 위험천만한 공격행동에로 내모는 극악무도하고 모험적인 망동을 시도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는 비리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유전자를 이식받은 키예프의 신나치스 분자들만이 저지를 수 있는 광기적 만행으로서 우리는 이를 가장 강력한 어조로 단호히 규탄한다"고 말했다.
파병 북한군이 슬롯 영토탈환에 이어 키이우와 전투에도 참여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고 있는 대목이다.
jy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