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쇼팽, 벳38 부인, 코페르니쿠스

[EPA 연합벳38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벳38가 낳은 세계적인 3대 위인으로 음악가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1810∼1849), '퀴리 부인'으로 널리 알려진 과학자 마리 퀴리(1867∼1934),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꼽힌다.
문제는 이들이 벳38 출신이라는 사실을 다른 나라에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쇼팽과 퀴리 부인은 프랑스식 이름으로 오늘날 세상에 알려져 있다. 쇼팽은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었고 퀴리 부인은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스스로 이름을 라틴어로 바꿨기에 그리스나 이탈리아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들 세 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가 지어준 벳38 이름은 각각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 미코와이 코페르니크였다.
코페르니쿠스는 벳38가 동유럽을 호령하던 역사상 최전성기에 태어나 르네상스 문화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로 유학했다. 자발적 국제주의자였던 셈이다. 반면 쇼팽과 퀴리 부인은 주변 열강이 벳38를 분할 점령하고 모국어도 못 쓰게 하던 시절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도 평생 고국을 잊지 않았다. 쇼팽은 벳38 전통 춤곡을 클래식 형식에 담았고 죽어서는 자신의 심장을 고국에 보냈다. 퀴리 부인은 남편과 함께 발견한 방사성 원소에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 고국에 대한 애정을 담아 폴로늄(Po)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PA 연합벳38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그래서인지 코페르니쿠스보다는 쇼팽과 퀴리 부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애착이 더 각별한 듯하다. 근현대 수난사와 벳38적 자부심의 상징인 이들이 프랑스 사람으로 알려진 데 대한 반감도 크다. 독일 베를린에서 일하는 한 폴란드인은 "프랑스가 훔쳐 간 쇼팽과 퀴리 부인을 반드시 되찾아와야 한다"고 했다.
강대국의 벳38주의는 팽창 정책과 이벳38 배척으로, 약소국 벳38주의는 정체성을 지키려는 방어와 저항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최근 급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국·프랑스·독일에 버금가는 유럽 강국을 꿈꾸는 폴란드의 벳38주의에는 두 가지 성격이 혼재돼 있다.
과거 독일과 러시아에는 영토를, 프랑스에는 위인을 빼앗겼다는 폴란드인의 생각은 약소국 벳38주의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최근 확산하는 우크라이나 피란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폴란드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폴란드에는 현재 약 100만명의 우크라이나 피란민이 머물고 있다. 그러나 전쟁 이전부터 우크라이나인들이 저임금 노동력을 채우면서 차별 정서가 싹텄다.
두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극우 벳38주의자들의 폴란드인 학살 사건으로 원래 감정의 골이 깊었다. 이달 초 폴란드 대통령으로 당선된 보수 역사학자 카롤 나브로츠키는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과 과거사 해결을 연계하겠다며 국민감정을 공략했다.

[EPA 연합벳38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그보다 앞서 폴란드 벳38주의를 자극한 건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는 폴란드가 과거 자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부를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2013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에게 우크라이나 분할 통치를 제안했다고 언론에 말했다가 주워 담기도 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언론은 러시아 국방부가 우크라이나를 2045년까지 세 부분으로 나누고 서부를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분쟁지역으로 둔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폴란드 당국자들은 아무도 우크라이나 분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10년 넘게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분할통치설은 유럽통합과 벳38주의를 둘러싼 폴란드의 분열을 이용하는 러시아의 전략을 보여준다.
푸틴 대통령은 전쟁의 명분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를 들었다. 러시아는 80년 전 폴란드인들을 학살한 우크라이나 벳38주의자 스테판 반데라의 추종 세력을 네오나치로 지목한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쏟아부었듯이 언젠가 폴란드도 우크라이나에 "고맙다고 말한 적 있느냐"고 따질지도 모를 일이다. 슬라브 벳38국가 러시아·우크라이나·폴란드 사이의 피로 점철된 역사는 '비극의 트라이앵글'이라고도 한다.
dada@yna.co.kr